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캐서린 헵번 (문단 편집) === 슬럼프 === 그러나 1930년대 중반부터 제작비에 비해 흥행 수익을 크게 거두지 못했다. 1934년 <기적의 처녀(Spitfire)>와 는 헵번의 자신감을 완전히 무너뜨렸고, 브로드웨이 무대로 돌아가 "호수(The Lake)"를 공연했지만 혹평 세례만 받았다. 대중은 헵번이 회사돈을 횡령한 아버지와 같이 도망친 뒤 [[케리 그랜트]]와 함께 셋이 사기를 치고 다니는 <실비아 스칼렛>과 작곡가 역의 헵번이 지휘자인 남편과 맞바람을 시도하는 도 맹렬히 싫어했다. ||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20221230_083756.jpg|width=100%]]}}} || || <실비아 스칼렛> || 1935년 [[아카데미 여우주연상]]에 두 번째로 후보에 올려준[* 수상은 [[베티 데이비스]].] 영화 의 성공을 제외하면 흥행 성적이 곤두박질 치고 있었다. 1936년 개봉한 에선 [[빅토리아 시대]]를 배경으로 유부남 애인의 아이를 조카로 위장해 기르는 여성을 연기했는데 헵번과 감독조차 상영 취소를 부탁할 정도의 망작이었고, 명감독 [[존 포드]]가 연출한 <스코틀랜드 여왕 메리>도 흥행과 당대 비평을 전부 망쳤다. [[할리우드]]를 떠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감지한 헵번은 동부로 돌아와 1937년까지 연극 "[[제인 에어]]" 투어를 했다. 결국 1938년에 극장주 연합[* Independent Theater Owners of America]으로부터 [[마를레네 디트리히]], [[메이 웨스트]], [[그레타 가르보]], [[조운 크로퍼드]], 에드워드 아놀드 등과 함께 '흥행국밥'[* "box office poison"]으로 불리게 되면서 [[할리우드]]에서의 커리어에 차질이 생긴다. <[[폭풍의 언덕/영화#s-2|폭풍의 언덕]]> 여주인공 역도 이 때문에 물을 먹었다. 언론과의 관계도 껄끄러워졌는데, 언론과 인터뷰를 하거나 사진을 찍어주는 걸 거절하는 등 언론에 불친절한 동시에 언론의 관심을 받는 것 자체는 매우 좋아해 오만하고 이중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. 헵번 본인도 70년대부터 언론에 친절해지면서 몇 번 실토했듯이 헵번은 명성, 관심, 인기를 그 무엇보다 좋아하고 추구하는 배우였다. 오히려 헵번은 이런 성향 덕에 할리우드에서 스타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. 하지만 헵번은 자신의 사생활 보도를 뜻대로 다 통제할 수 없는 언론의 속성을 참을 수 없었다. 게다가 팬들에게 사인해주길 거부하고 무례하게 구는 행동이 오래 지속되면서 대중의 평판 역시 점점 안 좋아졌다.[* 헵번은 팬에 대한 태도를 몇 십 년이 지나서야 고쳤다. 경력 후반엔 팬들에게 다정한 태도를 유지했다. 팬레터가 오면 아주 짧게라도 자필로 일일이 답장해주기도 했다.] 결국 헵번이 연기했던 [[아라곤의 카탈리나|Catherine of Aragon]]에서 따온 Katharine of Arrogance(오만한 캐서린)이라는 별명이 생겨 80년대까지[* 태도 변화가 시작된 건 70년대지만 예전 악명의 여파가 이때까지 남아있었다.] 헵번을 일컫는 호칭으로 자주 쓰였다.[* 그러나 이렇게 태도를 크게 지탄 받으면서도 사랑과 관심 역시 크게 받았기 때문에 비슷한 성격을 지녀 자주 공격 당하던 친구 [[로런 버콜]]이 매우 부러워했다.] 급기야 같은 해 RKO에서 B급 영화의 주연을 맡으라는 제의까지 들어왔다. 헵번은 이를 거절하고 아예 스스로 RKO와의 계약을 파기했다. 헵번은 그나마 흥행이 아주 심각하게 나쁘진 않았던 <스테이지 도어(Stage Door)>(1937년) 덕에 RKO가 제작하고 [[하워드 혹스]]가 감독한 코미디 <베이비 길들이기>(1938)를 계약해 [[케리 그랜트]]와 주연을 맡았지만 흥행에 실패했고 평도 그닥 좋진 않았다. 영화의 미친 코미디 감각이 당대엔 잘 이해 받지 못한 것이 결정적 실패 원인으로 꼽힌다. 그러나 50년대부터 정당한 재평가가 이뤄졌다. 이 영화가 워낙 강한 인상을 남긴 덕에 헵번 역시 [[로런 버콜]]이나 [[캐롤 롬바드]]처럼 혹스식 여성을 맡은 배우로 꼽힌다.[* 헵번은 영화 속 배역처럼 표범을 꽤 잘 다뤘다고 한다. 반대로 그랜트는 실제로도 표범을 무서워했다고. 조지 역을 연기한 개 애스더는 당대의 명연기견으로 [[레오 맥캐리]]가 감독한 그랜트의 대표작인 <[[이혼 소동]]>, [[윌리엄 파월]]와 [[머나 로이]]가 주역을 맡은 <[[그림자 없는 사나이]]>에도 출연했다.] 다시 그랜트랑 만난 1938년 [[컬럼비아 픽처스]] 제작의 코미디 영화 <휴일(Holiday)>은 당대에도 좋은 평을 받았지만 흥행엔 또 실패하고 말았다. 그럼에도 이 시기는 헵번이 코미디와 어둡고 진지한 드라마 양쪽 모두에 총명하고 민감한 재능을 갖고 있음을 증명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